짖지 않는 개

써보기 2017. 12. 21. 20:21 Posted by 진선애

기찻길 옆 오막살이 우리 아기 잘도 잔다.”

나이 오십을 넘긴 나는 요즘도 이 노래를 곧잘 흥얼거린다. 내 평생의 유일한 시골 생활. 나는 아직도 그때의 호기심과 설렘을 간직하고 있다.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는 종업식 날,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학교로 향했다. 전학절차를 밟기 위해서였다. 아버지의 발령으로 경상북도 영천군 옆의 작은 면인 신령면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포장 이사가 없었던 때였기 때문에 어머니는 몇 날 며칠을 손수 이사준비를 하셨다. 나는 동생들과 시골로 간다는 생각에 들떠 친구들에게 이사를 자랑하고 다녔다.

나 이사 간다. 우리 집이 신령을 이사한 데. 좋겠지? 부럽지?”

철없던 나는 시골생활이 어떠한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녔고 어머니는 이런 나를 보고 한숨 지으셨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차를 잘 타지 못한다. 차멀미가 심하기 때문이다. 포장이 잘 된 고속도로로 다닐 때도 차멀미를 하는데 비포장 도로였던 신령까지는 말해 무엇하리요. 나는 거의 초죽음 상태로 신령에 도착했던 것만 기억이 난다. 엄마가 입가에 대어 받쳐 주고 있던 비닐봉지와 멀미의 잔해가 남은 텁텁한 입 안의 메슥거림은 생각하기만 해도 진저리가 쳐진다. 그러나 멀미가 시작되기 전의 비포장도로는 멋있었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춘향이 빤스가 걸려 있네.”

내 나이대의 누구나 알고 있는 저질 개사 동요.

신령까지 가는 비포장 도로가는 춘향이 빤스가 걸려 있다는 미루나무가 무대 위의 미스코리아처럼 쭉 벗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 미루나무를 보며 이도령이 가지러 올라가다 떨어질 만하네.’ 라는 생각을 했다. 신령면 한복판에 도착하였다. 아버지는 경찰지서의 지서장이셨다. 준비되어 있는 사택은 신령면 한복판에 있는 목욕탕 옆 한옥이었다. 파란 철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당이 있었고 마당을 가로질러 맞은편으로 시멘트가 잘 발라진 높고 넓은 단 위로 펌프가 있었다. 그 펌프단 옆으로 길쭉한 직사각형형태로 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부엌이 맨 위쪽에 그 아래에 안방 , 대청마루, 건너 방 그리고 다시 또 방 이런 순서였다. 이렇게 세로로 길쭉한 집의 마무리는 쭉 달라붙은 툇마루가 하고 있었다. 난방에 신경을 썼는지 툇마루 안쪽으로는 미닫이문들이 완벽하게 일렬로 쭉 서있었다. 여름에는 미닫이문들을 활짝 열어 놓고 겨울에는 꼭꼭 닫아 두었다. 툇마루에 올라 미닫이문을 통과하면 안방이든 대청마루든 건너 방이든 또 그 건너 방이든 들어갈 수 있었다. 툇마루 아래로는 시멘트가 잘 미장되어 있어 그 밑으로 신발을 감출 수 있었다. 부엌은 마당보다 낮은 바닥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민속촌이나 사극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문이 달려 있었고 그 문은 안쪽에서 나무를 가로로 밀어 잠그는 잠금장치가 있었다. 자기 전에 반드시 이 문을 꼭 단속하고 잤다. 이 일은 어머니의 가장 큰 매일의 숙제였다. 부엌문을 열고 계단을 두 개 내려가면 부엌바닥을 디딜 수 있었고 오른 쪽으로 연탄아궁이가 두 개 있었다. 부엌문 정면과 왼쪽으로는 시멘트로 잘 미장된 부뚜막이 있었다. 그 위로 곤로와 찬장이 올려졌다. 부엌바닥은 시멘트로 잘 마감되어 있었고 하수구멍까지 있었다. 아궁이 옆 왼쪽으로 안방에서 바로 나올 수 있는 작은 문도 있었다. 겨울철에는 여기가 부엌이면서 지금의 욕실이 되었다. 어머니가 큰 찜통에 물을 데워 놓으면 식구들이 차례로 세수를 하거나 머리를 감았다. 집 뒤쪽으로 건너 방과 끝 방의 연탄아궁이가 있었고 재래식 변소가 따로 살짝 떨어져 위치하고 있었다. 시골 생활 중 가장 힘든 것이 변소 가는 일이었다. 나와 동생은 되도록 밤에 변소를 가지 않게 조심했고 어쩌다 가게 되면 상부상조, 십시일반 하였다.

오늘은 내가 따라 가주니 다음번엔 니도 따라 와야 한데이.” 손가락 걸며 약속하고 그 약속이 똥 약속이 되어 버리기도 하고. 연년생들인 삼형제는 그렇게 사시사철 변소 갈 때마다 서로에게 약속과 배신을 일삼았다.

대문을 열면 펌프대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나지막한 담을 지나면 높다란 철길이 자리 잡고 있다. 철길 밑을 따라 작은 도랑이 흘렀고 우리 집에서 도랑으로 나갈 수 있는 작은 문이 있었다. 나와 동생들은 그 문으로 나가 도랑 속을 살피면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기도 했다.

작대기로 도랑 속을 파헤치거나 내 새끼손가락보다 더 작은 물고기들을 지켜보면서.

도랑 옆 땅뙈기조차 놀리는 법이 없던 시골 사람들은 그곳에 호박이며 고추 같은 것을 심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들을 따라 호박을 심었고 여름날 우리 집 반찬으로 호박잎이 된장과 함께 매일 올라 왔었다. 세로로 길쭉한 일자형 집의 맞은편으로 빈 돼지우리가 있었고 나무 기둥위로 슬레이트 지붕만 덩그러니 올린 창고 같은 것이 있었다. 농부의 집으로 시작한 이 집은 어쩌다 경찰지서장의 사택이 되었고 다시 내 어머니의 손에 의해 도시문명의 색이 덧입혀졌다. 어머니는 펌프만 있던 펌프대에 수도를 넣고 수돗물이 잘 나오도록 모터도 달았다. 수도는 가뭄에도 우리 집에 맑은 물을 공급해준 오아시스가 되었다. 경상북도의 면 소재지 까지 오는 기차는 완행이거나 석탄이나 목재를 가득 실은 화물 열차였다. 몇 번의 완행이 지나갔는지 그때나 지금이나 알 수 없지만 완행이 지나갈 때 마다 나와 동생은 열차 안 승객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화물 열차가 지나가면 동생들과 마당으로 나와 기차 칸수를 세면서 놀았다. 기차는 새벽에도 한밤중에도 달렸다. 처음에는 기차 소리에 익숙지 못하여 잠을 설쳤다. 유난히 예민했던 어머니는 밤잠을 못 자 한동안 퀭한 눈을 하고 다니셨다. 그러나 어느덧 기차 소리는 자장가가 되어 기차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해질 정도가 되었다. 지금도 나는 잠을 청하기 위해선 라디오나 음악을 작게 틀어 놓는다.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잠을 쉽게 자지 못한다. 신령면 한복판에는 어김없이 오일장이 들어섰다. 우리 집은 그 오일장이 들어서는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 새벽부터 어디서 그렇게 많은 장돌뱅이가 모여드는지 천막이 쳐지고 임시 점포가 늘어선다. 장이 시작되면 온 동네가 맛있는 냄새를 풍긴다. 그 냄새를 따라 킁킁거리면서 나와 동생은 사냥개처럼 장터를 돌아다닌다. 파장이 되고 해가 넘어가 어두컴컴할 때까지 이리저리 쫓아다니다 어머니 손에 끌려 집으로 돌아왔다. 알록달록 옷도 팔고, 차력하면서 약도 팔고, 형형색색 채소도 팔며, 비릿한 생선도 팔고, 모든 짐승 고기와 온갖 군것질거리가 장터 바닥에 널려 있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이때 내가 어머니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그러다 영영 장돌뱅이가 된데이. 어디를 그렇게 돌아 댕기노.”였다. 정착하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진리인 어머니에게 장돌뱅이는 큰 문젯거리였다. 모든 것을 다 장돌뱅이에 비유하면서 나를 나무라시곤 했다. 그 어미에 그 딸이 아니랄까봐 나도 내 아이들에게 장돌뱅이를 들먹이면서 나무라곤 한다. 아이들이 늦게 귀가를 하면 꼭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장돌뱅이가 될래?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거냐!”

장돌뱅이가 나쁜 것, 무서운 것, 두려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시골 생활은 잡종 개 메리를 들이면서 적응에 박차를 가했다. 메리는 누렁이도 아니고 검둥개도 아니었다. 발 부분은 흰색이 가미된 누렁이었고 등판은 검둥개가 슬쩍슬쩍 자신의 핏줄을 보여주는 누렁이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았던 메리는 마당에서 놀다가 저녁이 되면 목줄로 돼지우리 옆 개집에 묶였다. 메리는 순둥순둥 주인을 잘 따르는 똥개였다. 잘 짖지도 않고 항상 꼬리가 살랑살랑거리는 꼬리 치는 개였다. 어느 날 메리가 사고를 쳤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그해는 마늘 농사가 흉년이었다. 그해 마늘 농사를 지었던 농부들은 다들 울상이 되었고 마늘 값이 금값만큼 비싸졌다. 농촌에도 도둑이 있었다. 나는 그해 여름에 처음 알았다. 농촌의 도둑은 농작물을 훔쳤다. 우리 집 열린 창고는 동네 농부들의 창고로 사용되었다. 마늘이 널리기도 했고 양파가 들어차기도 하며 고추가 빨간 맛을 뿜어내며 양탄자처럼 깔리기도 했다. 그해 여름 우리 집 창고에는 마늘이 주인공이 되었다. 바닥에 널리고 슬레이트 지붕을 받치는 석가래 아래로 처녀 댕기 머리처럼 쭉 달렸다. 나와 엄마는 잠귀가 귀신처럼 밝다. 누군가가 뽀스락 거리기만 해도 단번에 들었던 잠이 깬다. 그 날의 오밤중, 나는 낯선 소리에 잠이 깨어 엄마를 소리 높여 불렀다. 그 낯선 소리는 기차소리도 아니고 아버지 코 고는 소리도 아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듣는 낯선 소리였다. 소름이 돋고 무서워져서 안방의 엄마를 소리 높여 불렀다. “엄마, 엄마, 엄마이 소리와 함께 후다닥거리는 더 큰 낯선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아버지가 차례로 깨어서 나를 진정시키고 낯선 소리의 정체를 찾아 나섰다.

우리 집에 널리고 달려있던 마늘의 반이 없어진 것을 발견한 것은 아버지이다. 직업정신이 발동한 것이다. 급히 비상전화를 돌리고 동네에 불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마늘 도둑은 우리 집 창고의 마늘을 훔치다 엄마를 찾는 내 소리에 놀라 담을 넘어 철길로 도망을 갔다. 그 날 밤 마늘 도둑들은 신령 면의 마늘들을 모두 훔칠 계획이었던 것일까. 많은 집에서 마늘이 없어졌고 그 마늘들은 기차역 부근 주인 없는 낡은 트럭에서 발견되었다. 똥개 메리는 도둑을 보고도 짖는 대신 꼬리를 쳤던 거다. 정신없던 그 밤이 지나고 다음 날 메리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니가 개가, ? 이놈의 똥개가 짖지도 않고, 확 밥을 안 주삘라.”라는 구박을 받았다. 이 구박은 동네 사람들이 아이고 지서장님예. 개는 주인 닮는다 하잖아예. 지소장님이 맘이 좋으니 개까지 아무한테나 다 꼬리치는 거라예. 짖지도 않고.” 란 칭찬의 소리에 멈추었다. 우리 집 똥개 메리 대신 동네 마늘 도둑에게 짖었던 것은 나였다. 나의 밝은 잠귀 덕에 동네 농부들의 마늘을 오롯이 다 찾을 수 있었다. 한동안 마늘 도둑과 짖지 않은 개 메리, 그리고 내 잠귀 얘기는 동네에 회자되었다. 그리고 여름이 거의 지나가던 어느 날, 어머니가 기겁하며 울고불고했던 사건이 일어났다. 어머니는 도시여자였다. 한 번도 시골 생활을 해 본적이 없는 전형적인 그 시대의 배운 여자였다. 이 시골 생활은 어머니에게는 버거운 생활이었다. 아버지 때문에 겨우 견디고 있었다. 어머니는 죽었다 깨어나도 생각할 수 없었다. 칼로 닭의 목을 내리치거나 갓 잡은 고기를 다듬는 일을. 학교에서 돌아 와 보니 어머니는 마당을 빙빙 돌면서 울었다 웃었다 하고 계셨다. 동생들과 나를 보자 어머니는 실성한 사람처럼 우리를 붙들고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소리소리 치셨다. 그러나 호기심이 고양이 보다 컸던 나는 붙잡는 어머니를 뿌리치고 부엌으로 쪼르륵 달려갔다가 식겁하고 뛰쳐나왔다. 어머니가 왜 울고 웃고 했는지 알았다. 부엌 부뚜막에는 금방 잡은듯한 소머리가 덩그러니 고삐도 끼워진 채 올려져있었다. 삶은 돼지 머리는 본적이 있지만 금방 잡은 듯 털과 고삐가 그대로 있는 소머리는 그 때 처음 봤다. 어머니도 그랬던 거다. 아버지는 그걸 인편으로 보내면서 잘 다듬어 삶으라는 부탁도 했던 거다. 아버지가 소머리를 보냈단 소문은 금방 퍼져 이웃 농부의 아내들이 우리 집으로 몰려 왔다. 구경하려고. 울고 웃는 어머니를 달래서 동네 아낙들이 함께 소머리를 다듬었다. 수돗가에서, 물을 펑펑 틀고, 합심하여 소머리를 다듬었다. 다듬어진 소머리를 끓는 물에 넣고 우려내어 소머리 곰국을 만들었다. 온 동네가 몇 끼니를 소머리 국으로 해결하면서 몸보신을 했다. 그날 이후로 어머니는 곰국을 입에도 대지 못하였고 곰국 끓는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난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게 되셨다.

농작물 도둑이 극성을 부렸던 내 초등 3학년의 여름은 소머리를 우려내는 누린내와 함께 가을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우리 집 똥개 메리는 여전히 아무에게나 꼬리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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