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부는 날

써보기 2017. 12. 21. 20:23 Posted by 진선애

바람 부는 날  

바람이 많이 불던 날이었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쓴 나그네가 문을 두드리며 바람을 피해 한 잔의 커피를 부탁할 것 같은 날이었다. 그 날. 옆집 소명이 엄마가 우리 집 벨을 눌렀다. 엄밀히 말해서 바로 옆집은 아니다 . 목동 아파트 35평형이 모여 있는 동은 여타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는 35평형대의 건물 구조가 아니다. 복도식도 아니요 계단식도 아닌 두 개가 섞여 있는 건물 구조이다. 3개 호수가 한 라인을 이루고 중간 집은 복도 형이고 양 끝집은 계단 형인 그런 구조이다. 소명이네와 우리 집은 대문을 마주보고 있는 양끝 집이다. 소명이 엄마와 나는 한 살 차이이다. 내가 한 살 더 많은 언니이며 같은 동향 사람이다. 친정과 시댁을 모두 대구에 두고 있는. 벨을 누른 소명 엄마는 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날려갈 것 같은 핼쑥하고 파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고 금방이라도 그 큰 눈에서는 눈물이 굵은 빗방울처럼 떨어질 것 같았다.

, 소명 엄마, 어서 들어와요. 우리 집에 놀러 처음 오시죠? 바람이 많이 불어요.”

이렇게 불쑥 찾아 와서 미안해요. 들어가요 될까요?”

아유, 내가 언제든지 놀러 오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잘 왔어요.”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소명엄마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바람을 뚫고 복도를 지나 우리 집 까지 온 것이 대단해 보일 정도였다.

나는 어수선하게 어질러진 식탁 위를 바삐 치우며 호들갑스런 미소로 소명엄마를 안심 시키듯 말했다.

커피 한잔 주세요. 커피 마시고 싶어서요. 집에 커피가 떨어졌어요.”

나는 전기주전자에 물을 채우고 스위치를 넣었다. 그러면서도 등 뒤의 센스는 풀로 작동하고 있었다. 여자의 직감은 무서운 거다. 저 까칠한 여자가 그냥 온 것은 아닐 거라고 커피 주전자가 증기를 토해내며 나에게 속삭인다. 소명엄마는 평범한 전업주부가 아니다. 방송국의 프로그램을 맡아서 대본을 써주는 방송 작가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소명이 언니가 우리 집 아이와 동갑으로 같은 학교를 다니고 같은 아파트 같은 층에 살게 되었다는 인연으로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의 일이 바빠서 인지 잘 보이지 않았고 마주칠 때는 항상 내가 먼저 말을 거는 편이었다. 소명 엄마는 말이 없는 사람인지 말이 하기 싫은 것인지,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남편에게 재수 없는 여자라고 흉도 봤다. 그런 까칠하고 속모를 여자가 우리 집 벨을 눌렀다. 파리하고 핼쑥한 모습으로. 나는 뭐라고 말을 붙일까 냉장고 속 과일을 꺼내면서 궁리했다.

소명 엄마 , 잠깐만 기다려요. 과일 깎아 커피하고 같이 가져갈게.”

소명엄마는 식탁유리를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요? 안색이 참 안 좋네. 그 집은 걱정거리가 없어 보이던데.”

나는 어렵게 첫 운을 띄웠다. 사실 이 말은 거짓말일 수 있다. 소명이네가 이곳으로 이사를 온 후 그 집에서는 자주 소명 엄마의 비명 같은 고함 소리가 집 밖을 넘어 복도에 울려 퍼졌다. 소명이 언니는 우리 아이한테 이런 말도 했다.

엄마가 내 친구들을 데리고 오면 안 된다 했어. 친구들을 데리고 가면 야단맞아

우리 애는 이게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나에게 전했고 나는 다시 남편에게 전했다.

이상한 집이다 그지? 하이고, 도도한 척은 혼자 하면서 집을 안 치우고 사나봐. 아무리 지 일이 바빠도 그렇지. 방송작가가 무슨 벼슬이라고 애들 친구도 못 오게 한데? 그러면서 지 애는 다른 집에 놀러 보내고 말이야.”

사과를 한입 베어 문 소명엄마가 갑자기 눈물을 툭하니 떨구었다. 나는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놓친 뻔 했다.

아이고, 소명 엄마. 무슨 일이래? 왜 울어요. 울지 말아요. 말해 봐요, 내가 들어 줄게!”

오늘 소명이 상태에 대한 최종 결과를 듣고 왔어요. 그리고 제 잘 못이 아니래요. 그런데 힘들어요, 죽고 싶어요. 아이도 죽이고 나도 죽고. 인생이 이렇게 괴로운 것 인줄 몰랐어요.”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며 소명엄마가 털어 놓는 말들로 그간의 모든 퍼즐이 한꺼번에 맞추어졌다.

소명이는 아기 때부터 늦되었다. 아이들이 길 때 뒤집기를 하고 아이들이 걸어 다닐 때 기어 다녔다. 아이들이 뛰어다닐 때 앉기를 할 수 있었다. 걷지를 않아 별별 검사를 다 해 봤다. 태어나서 4년이 되어 갈 무렵 소명이가 걷기 시작했다. 그때의 기쁨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언니가 한글을 저절로 깨우쳐 소명이 또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만이 감지할 수 있는 이상함이 조금씩 아이한테 보이기 시작했다.

소명아 우리 모양 맞추기를 할까?”

이렇게 시작된 놀이는 소명 엄마의 고함으로 끝이 나거나 소명이의 깽판으로 끝이 나버렸다.

소명이가 모양을 맞출 수 없어서 엄마가 가르치다, 가르치다 짜증이 돋아 소리치게 되거나 소명이가 엄마의 아니야 , 틀렸어라는 소리에 분을 참지 못하고 판을 뒤엎어버림으로 끝이 났다. 학교 들어 갈 나이가 되어 한글을 가르치면서 다시 한 번 온 집이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소명이가 글자모양을 잘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1학년인 소명이는 학교에 가서도 골칫거리가 되었다. 급기야 담임 선생님이 소명엄마에게 전화를 해 지금 당장 집으로 데리고 가라는 말을 할 지경에 이르렀다. 소명이 손을 잡고 소명이 같은 아동들을 진단해 준다는 곳으로 가서 여러 가지 검사를 했다.

 

그 결과를 오늘 소명엄마가 듣고 왔다.

 

털어 놓고 싶고 어디다 하소연 하고 싶은데 주위에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찾아 왔어요.

의사선생님이 저보고 아이를 훌륭하게 잘 키웠데요, 저보고 할 만큼 했데요. 저는 모든 것이 제 책임인줄 알았어요. 제가 무엇을 잘못 했을까 임신 기간부터 지금까지 시계바늘을 돌리면서 매일 생각해봤어요. 내 잘 못이 아니라는 의사 선생의 위로의 말에 안도하는 제 모습이 싫었어요. 왜 하필이면 내 아이일까요? 물었더니 의사 선생님이 소명이는 앞으로 나가는 아이이니 큰 문제가 없다고 했어요. 조금 늦게 목적지에 도착하는 거니 괜찮다고 했어요. 지체가 아니라고 했어요.”

그동안 나는 소명엄마를 오해하고 있었다. 나도 같이 눈물이 나왔다. 자식을 키우는 어미로서 같은 어미인 소명 엄마를 보고 있으니 내 가슴도 아파왔다. 소명이는 인지기능치료를 시작한다.

소명이가 정서에도 문제가 있데요, 부모의 몰이해와 아이의 눈높이만큼 행동이 따라 주지 않아 소명이 내부에는 분노가 쌓여 있데요. 그걸 풀어줘야 한다고 해서 놀이 치료도 같이 받아요.”

소명이네로 이런 치료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소명 엄마가 사회생활을 하니 이런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한 잔의 커피를 더 타서 들고 오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소명 엄마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저 가녀린 몸에 그 짐을 오롯이 지고 왔을 거라 생각하니 짠하여 보였다.

마주칠 때 마다 살이 더 빠지는 듯 보여 날씬한 것들이 더 하다니까라면서 흉 본 일이 부끄러워졌다.

소명엄마, 사과 더 먹을까? 이제 살 좀 찌워봐. 그래야 힘이 나서 소명이도 더 잘 보지. 너무 걱정 말아요, 천천히 간다고 생각하랬잖아. 인생 길잖아.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와요. 나는 하는 일 없잖아. 그나저나 나는 방송작가가 무슨 일하는지 정확히 잘 몰라. 그 얘기 좀 해 봐. 이제 소명이 걱정은 좀 접어놓고.”

나는 더 수다스럽게 소명엄마에게 말을 붙였다. 저 조그만 여자의 창백한 얼굴에 웃음이 묻어나니 큰일을 하나 해 낸 듯하다. 창으로 새어들어 온 바람 소리와 우리의 수다가 어울려 오케스트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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